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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은혜를 갚을 줄 아는 한국

몇 년 전 아름다운 모임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LA총영사 관저에서 열린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 초청 만찬 행사였다. 이날 모인 많은 은발의 인사들은 젊은 시절 한국에서 봉사했던 분들이었다.   이날 참석자 중에는 캐서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도 있었다. 그녀는 나의 제2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봉사활동을 했단다. 그리고 그곳 주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훗날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대사가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날 그녀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평화봉사단 회원들이 세계 곳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받아들였던 나라 중에서 스스로 봉사단체를 만들어 다른 나라로 파견하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이 현재 필자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다. 조선 왕조 말기 암울했던 시기에 에비슨, 알렌 박사 등은 선교활동을 위해 조선 땅에 들어왔다. 이들은 서양 의술을 시술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세웠다. 제중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다. 에비슨 박사가 미국에 귀국, 카네기 홀에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자 감명을 받은 한 사업가가 그를 찾아왔다. 새 병원을 지을 수 있는 돈을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세브란스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는 등 정치적 사정으로 병원 건축은 지연되었고, 필요한 자금 규모도 늘어만 갔다. 그러나 세브란스는 그때마다 필요한 자금을 추가로 기부했다고 한다. 에비슨 박사는 1910~1911년 사이 선교 본부에 자신이 지향하는 세브란스 병원의 목표를 다음의 10가지 항목으로 기술하였다고 한다.   1. 세브란스 병원은 현재 미국에 있는 병원과 동일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2.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 많은 미국 의사들이 일해야 한다. 3. 그러는 동안 한국인 의사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미국 의사들이 떠난 뒤에도 높은 의료 수준을 유지하게 한다. 4. 훌륭한 교수들이 있어야 한다. 5. 학생들은 충분히 훈련을 받아야 한다. 6. 의료 시술만이 아니라, 의학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7. 치과 대학이 세워져야 한다. 8. 약학 대학과 , 제약 사업이 있어야 한다. 9. 안과 질환 치료와 안경 제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10. 약품, 안경 제조 등의 사업을 통해서 병원은 독립이 가능해야 한다.   그가 이런 편지를 보낼 당시 한국은 많은 문제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세브란스 병원은 1908년 6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2회 졸업생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11년에야 가능하였다. 교실과 교수의 부족 문제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선교사들의 반대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세브란스 병원은 에비슨 박사가 목표했던 10가지 항목을 모두 달성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세계의 저개발 국가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현재 90여명의 세브란스 졸업생들이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아시아,중동 지역 등에서 인술을 펼치고 원주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다른 특수한 의료 선교 프로그램은 이들 국가의  젊은 의사들을 세브란스로 초청해 이들이 마음 놓고 현대식 대장 검사, 복막경을 이용한 수술 등 여러 가지 최신 의료 시술법과 진단 방법 등을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500여 명의 의사가 초청됐고, 그들은 이렇게 배운 의술로 자기 나라에서 많은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아직 평화봉사단으로부터 받았던 혜택을 다 갚지는 못했지만 한국은 한층 더 진화된 방법으로 이를 갚아가고 있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은혜 한국 세브란스 병원 한국 최초 시절 한국

2024-10-08

[기고] “한국 낙제생이 미국서는 1등”

 1980년 3월 연세대 의예과 1학년으로 입학한 나는 학생들의 데모로 어수선한 시기에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다. 턱걸이로 의예과 2년을 간신히 마치고 본과에 진학했는데 본과 공부는 너무 힘들었다. 대학 입학 전 한국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었던 나는 한국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는 있었지만, 문자로서 한국어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해부학 용어를 익히고 암기 위주의 생화학 수업을 받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나는 그렇게 본과 1학년을 끙끙거리며 학업에 매달렸지만, 유급을 면하지 못했다. “그 서양 애가 떨어졌대”라는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지게 됐고 이렇게 망신스러운 상황은 심적으로도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패배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본과 1학년 교실에 들어가 앉았다.   강의가 시작되고 고개를 들어보니 놀랍게도 내 주변에 아는 얼굴이 많이 보였다. 180명 정도의 1학년 동기 중 30명 이상이 함께 낙제한 것이었다. 첫날 수업 후 우리는 학교 근처 생맥줏집에 모여서 “너도 낙제했냐? 나도 낙제했다”라고 하며 진한 우정을 나눴다.     2학년부터는 기초과목 외에 임상과목도 배우게 되는데 나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암기보다 이해 과목이 많아 공부가 수월해졌다. 4학년에 보는 의사 국가고시는 시험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한자어로 된 의학용어가 에베레스트산 같은 큰 고비였다.  3개월간 한자 어휘를 공부하느라 바빴고, 시험 당일에도 한글 읽는 속도가 느려 겨우겨우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국가고시는 합격이었고 이때는 정말 설 명절이 열 번 온 것 같이 행복했다.   열흘 뒤 미국 의사 국가고시 기초과목 시험이 있어서 역시 필사적으로 준비했지만 불행히도 1점 차로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 도착해서 다시 국가고시를 준비해야 했다. 시험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미국의 사설학원에 등록해 3개월 동안 강의 테이프를 들으며 기초시험을 준비했다. 돈이 없어 끼니도 거르던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국가고시 시험을 다시 치렀다. 3000명이 시험을 쳤는데 합격자가 120명인, 합격률이 4%에 불과한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래도 나는 당당히 합격했다. 그 뒤 나는 수련병원을 구하려고 50군데가 넘는 병원에 지원서를 내며 면접을 봤고 한 병원에 600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그러나 이 시절,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미국 졸업생들은 알지도 못하는 작은 나라의 졸업생이라고 나를 무시하고 차별했다.     그러던 중 수련의 평가시험이 있었다. 시험을 치르고 며칠 뒤 과장이 칠판에 내 이름을 적었다. 내가 수련의 중에 1등이었다. 나는 순간 내 이름을 보고 놀라서 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한국 연세대에서도 본과 1학년을 낙제했던 낙제생 아니었던가.   미국 대학 졸업생들도 모두 놀랐고 그날 이후 나에 대한 무시와 차별 대우는 끝났다. 나는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고 나왔다. 목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커지며 “한국의 낙제생이 미국 졸업생보다 뛰어나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한국의 힘은 이런 데 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미국에 이민 온 한국 사람들도 평균 1년이면 80% 이상이 새 차를 사고 5년이 지나면 80% 이상이 집을 마련한다.     미국에 이민 온 다른 나라 이민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대단한 근면성이다. 참으로 한국 민족이 대단하고 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과 세브란스의 교육에 너무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이렇게 월등히 우수한 우리 민족이 왜 그렇게 스스로 과소평가를 하는가는 의문이다. 지난 50년 동안 인류 역사가 가장 빨리 변하고 발전했고,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이 가장 큰 발전을 이뤄내고 인류 발전에도 가장 많이  이바지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깨에 힘을 주고 목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커져도 될 만큼 자랑스러운 일이다. 나는 강연자로 어디에 서든 패배의식을 던져버리고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인요한 /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기고 미국 낙제생 국가고시 시험 한국 연세대 시절 한국

2021-11-10

[기고] “한국 낙제생이 미국서는 1등”

1980년 3월 연세대 의예과 1학년으로 입학한 나는 학생들의 데모로 어수선한 시기에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다. 턱걸이로 의예과 2년을 간신히 마치고 본과에 진학했는데 본과 공부는 너무 힘들었다. 대학 입학 전 한국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었던 나는 한국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는 있었지만, 문자로서 한국어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해부학 용어를 익히고 암기 위주의 생화학 수업을 받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나는 그렇게 본과 1학년을 끙끙거리며 학업에 매달렸지만, 유급을 면하지 못했다. “그 서양 애가 떨어졌대”라는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지게 됐고 이렇게 망신스러운 상황은 심적으로도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패배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본과 1학년 교실에 들어가 앉았다.   강의가 시작되고 고개를 들어보니 놀랍게도 내 주변에 아는 얼굴이 많이 보였다. 180명 정도의 1학년 동기 중 30명 이상이 함께 낙제한 것이었다. 첫날 수업 후 우리는 학교 근처 생맥줏집에 모여서 “너도 낙제했냐? 나도 낙제했다”라고 하며 진한 우정을 나눴다.     2학년부터는 기초과목 외에 임상과목도 배우게 되는데 나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암기보다 이해 과목이 많아 공부가 수월해졌다. 4학년에 보는 의사 국가고시는 시험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한자어로 된 의학용어가 에베레스트산 같은 큰 고비였다. 3개월간 한자 어휘를 공부하느라 바빴고, 시험 당일에도 한글 읽는 속도가 느려 겨우겨우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국가고시는 합격이었고 이때는 정말 설 명절이 열 번 온 것 같이 행복했다.   열흘 뒤 미국 의사 국가고시 기초과목 시험이 있어서 역시 필사적으로 준비했지만 불행히도 1점 차로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 도착해서 다시 국가고시를 준비해야 했다. 시험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미국의 사설학원에 등록해 3개월 동안 강의 테이프를 들으며 기초시험을 준비했다. 돈이 없어 끼니도 거르던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국가고시 시험을 다시 치렀다. 3000명이 시험을 쳤는데 합격자가 120명인, 합격률이 4%에 불과한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래도 나는 당당히 합격했다. 그 뒤 나는 수련병원을 구하려고 50군데가 넘는 병원에 지원서를 내며 면접을 봤고 한 병원에 600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그러나 이 시절,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미국 졸업생들은 알지도 못하는 작은 나라의 졸업생이라고 나를 무시하고 차별했다.     그러던 중 수련의 평가시험이 있었다. 시험을 치르고 며칠 뒤 과장이 칠판에 내 이름을 적었다. 내가 수련의 중에 1등이었다. 나는 순간 내 이름을 보고 놀라서 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한국 연세대에서도 본과 1학년을 낙제했던 낙제생 아니었던가.   미국 대학 졸업생들도 모두 놀랐고 그날 이후 나에 대한 무시와 차별 대우는 끝났다. 나는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고 나왔다. 목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커지며 “한국의 낙제생이 미국 졸업생보다 뛰어나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한국의 힘은 이런 데 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미국에 이민 온 한국 사람들도 평균 1년이면 80% 이상이 새 차를 사고 5년이 지나면 80% 이상이 집을 마련한다.     미국에 이민 온 다른 나라 이민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대단한 근면성이다. 참으로 한국 민족이 대단하고 또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들과 세브란스의 교육에 너무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이렇게 월등히 우수한 우리 민족이 왜 그렇게 스스로 과소평가를 하는가는 의문이다. 지난 50년 동안 인류 역사가 가장 빨리 변하고 발전했고,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이 가장 큰 발전을 이뤄내고 인류 발전에도 가장 많이 이바지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깨에 힘을 주고 목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커져도 될 만큼 자랑스러운 일이다. 나는 강연자로 어디에 서든 패배의식을 던져버리고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인요한 /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기고 미국 낙제생 국가고시 시험 한국 연세대 시절 한국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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